*이 글은 Talcott Parsons. “Illness and the Role of the Physician: A Sociological Perspective.” American Journal of Orthopsychiatry 21, no. 3 (1951): 452-460. DOI: https://doi.org/10.1111/j.1939-0025.1951.tb00003.x를 번역한 것이다.
*이 블로그에 이전에 게시된 1, 2 부분의 오역을 수정하여 통합했다.
*절 구분은 역자가 임의로 한 것이며 원문에는 없다.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
이 논문은 질병illness의 현상들, 치료의 과정들, 그리고 치료사들의 역할의 몇몇 특징들을 근대 서구 사회의 전반적인 사회적 평형이라는 관점에서 논하고자 한다. 제목의 “사회학적 관점”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다. 이는 당연히 의사와, 임상심리학자와 사회복지사 같이 환자를 돌보는 데 직접적으로 연관된 다른 사람들이 대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소 다른 관점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병인론病因論적 요인들에 대한 기술技術적인 지식을 질병 상태에 단순히 적용하는 측면,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로서의 그 상황에 대한 그들의 조작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더 많다. 이 논문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기술技術적인” 관점이 더욱 잘 들어맞는 사회적 배경에 관련하여 무엇인가를 추가하는 일이다.
명백하게도 유기체의 생물학적 과정들은 질병 상태를 결정하는 요인의 한 중요한 측면을 구성하며, 그것들에 대한 조작은 치료 과정의 주된 초점 하나를 구성한다. “유기 의학”이라는 이 측면은 여기서 간접적으로만 다뤄질 것이다. 하지만 심신의학心身醫學의 진전이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대부분의 증상이 유기적인 영역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심인心因적 요소가 관련된다. 더욱이, 조건 자체가 우선적으로 “심리적” 의미로 정의되는, 즉 그의 인성personality에 관련한 개인의 동기動機 지어진 적응과 사회 세계 안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면에서 정의되는 신경증과 정신증도 있다. 우리의 근본 논지는 이러한 수준에서의 질병이 사회 체계의 이른바 “동기적 경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에 상응하게 치료 과정 또한 같은 동기적 균형의 일부로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 될 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질병은 사회학자들이 “일탈적” 행위라고 말하는 것의 특별한 종류로 다뤄질 수 있다. 이는 개인이 그것을 통해 사회와 관계를 맺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역할에 대한 제도적으로 정의된 기대를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하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 사회학적 측면에서 정의된 행동을 의미한다. 관련될 수 있는 동기적 요인의 복잡성이 어떠하든, 일탈이나 역할 기대에 대한 충족에서 멀어지는 것에 맞서는 순응이라는 차원이 항상 그 과정의 결정적인 차원이다. 정의상 환자는 어떤 측면에서 정상적인 사회적 의무를 충족할 수 없는 것이고, 아프거나 아파 온 환자의 동기는 이 사실에 대한 약간의 참조점을 가진다. 반대로 [역할 기대를] 정상적으로 충족할 수 있는, 사회 집단의 구성원임이 항상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건강의 한 측면이기 때문에, 치료 과정은 항상 사회적 역할을 정상적인 방식으로 수행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을 한 차원으로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네 개의 주제하에서 다룰 것이다. 첫째, 그것이 동기에 의한 것이고, 그러므로 일탈적 행위로 분류될 수 있는 한에서의 질병 발생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나는 환자의 역할을 오직 “조건”이 아니라 정확히 사회적 역할로서 말할 것이다. 셋째, 나는 의사의 역할의 몇몇 측면을 간략하게 분석하고 그것들과 치료 과정이 맺는 연관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나는 두 역할이 사회 체계의 전반적인 평형에 들어맞는 방식에 대해 말할 것이다.
Ⅰ
질병이 동기에 의한 현상인 한, 사회학자는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일부 특징이 질병의 발생 과정에서 한 부분을 맡는 방식에 특히 관심이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에는, 당연히 구성적이며 유기적으로 중요한 환경적 요인(예: 박테리아)이 있고, 또한 의심의 여지없이 개인의 인성에 내재적인 심리적 요인이 있다. 하지만 인성이 발달하고 작동하는 데 타인과의 관계가 갖는 막대한 중요성과 관련된 증거가 아주 강력하다. 그렇다면 사회학자의 강조점은 사회적 상호 작용 과정에서의 타인과의 관계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에 있다. 아마도 이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년기의 과정일 것이고, 가족 구성원, 당연히 특히 부모와의 관계가 중심적일 것이다. 하지만 필수적인 현상들은 생애 과정 전반에서 관련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은 대개 개인에게, 그 사람의 자원을 고려했을 때 그가 잘 다룰 수 없는 압력이 부과되는 것과 같다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신병리학에서 기여한 것과, 이론과 사회학을 공부하는 것의 결합은 대인 관계에서 어떤 종류의 상황이 가장 잠재적으로 병의 원인이 되는[병원病原적] 압력을 부과할 법한지, 그리고 그러한 압력에 대한 반응의 본성이 어떠할지 모두에 대한 좋은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아주 간략하게 나는 병원적 압력이 두 주요 지점의 중심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첫 번째는 정신의학자들이 종종 “지원”이라고 부르는, 한 사람이 주변으로부터 받는 것과 관련된다. 본질적으로 이는 그가 적절한 역할을 맡는, 집단의 어엿한 구성원이라고 인정되었다는 것으로 정의될 것이다. 어린이에게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족에 의한 인정을 의미한다. 개인은 정서적으로 “원하게 되고” 상당한 한계 안에서 이러한 태도는 그의 행동의 세부 사항에 조건적이지 않다. 두 번째 측면은 집단의 구성요소가 되는 가치 유형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이 집단은 두 사람의 이자二者 관계만이 될 수도 있지만 대개 더 규모가 큰 집단이다. 그러므로 거절, 집단의 다른, 특히 가장 책임이 있는 구성원이 집단의 규범에 반해 꾐에 넘어갈 수 있음, 책임이 있는 이러한 구성원들의 규범 실행에 대한 회피, 그리고 마침내 그들에 대한 강압적 “계율적” 시행은 사회적 관계 안의 압력의 기본적인 원천이다. 불행하게도 여기에 이러한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언급할 분량을 할애할 수 없다.
그러한 압력에 대한 반응은, 주된 윤곽에서, 상대적으로 정신병리학 학생에게 익숙하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불안, 환상의 생산, 적대적 충동, 그리고 특정 방어기제에의 의지와 같이 나열될 수 있다. 보통 우리는 사회적 관계에 관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적대적인 충동을 다루는 것과 관련한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경감하는 것에 관해 그러한 압력이 특정한 방식으로 적절히 다뤄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기로는 그 결과는 양가적인 동기적 구조 산출이 될 것이다. 여기서,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동기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한 방어기제와 적응기제에의 의존이 있을 수밖에 없다. 타인들을 향한 태도는 그렇게 함으로써 동기적 구조의 억눌린 요소에 맞서는 방어에 대한 요구 때문인 강압성이라는 특별한 속성을 얻게 된다. 이 양가적인 구조는 두 주된 방향 중 하나로 진행될 것이다. 첫째, 적대적인 면에 대한 억제로 인해, 기대를 따르고 목적[사회적 관계]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강압적인 필요가 진전된다. 둘째, 적대적인 면의 우세로 인해, 순응에 대한 기대와 목표하는 결과로부터의 강압적인 소외가 진전된다.
그러한 강제적인 동기는 불가피하게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개인의 태도를 왜곡한다. 이는 개인이 상호 작용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압력을 부과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병리학적 동기는 양가성을 심화하는 잘못된 원환에서 생긴다고 말해질 수 있다. 어린이로 말해 보자면, 개인은 어른의 강압적 동기에 의해 그러한 압력을 받는다. 이에 대한 방어로 어린이 스스로는 강압적인 동기에 대한 보충적인 양식을 개발하고, 그 과정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그 둘이 “서로에게 작용하기”를 계속한다. 이 연결에서, 강제적인 순응이라고 불렸던 어떤 양식이 더 큰 사회 집단에서 일탈이라고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이 특히 언급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종종 정신병리적 “매개체”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는 그들 자체로는, 질병의 형식에서든 다른 것에서든, 분명하게 일탈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질병 혹은 일탈의 다른 형식으로 무너져 내리기 쉬운 인성 구조의 유형이 발생하는 원흉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고찰에서 두 중요한 결론이 정당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우리가 논의해 왔던 것, 사람에게 부과되는 압력의 유형들이 인성과 사회적 관계 모두를 해체한다는 것이다. 개인적 해체와 사회적 해체는, 유의미한 정도로, 같은 구체적인 절차의 양면이다. 이는 명백하게 정신의학과 사회과학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둘째, 일탈적 행동의 형식으로서의 질병은 독특한 현상이 아니라 더 넓은 범주 안의 한 유형이다. 이것은 개인에게 열려 있는 여러 선택지의 묶음 중 하나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질병에 더 취약한 심리적 기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것에 그러할 것인 이유는 있다. 하지만 가변성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있고, 그러한 선택지 사이에서의 선택은 수많은 변수들의 기능일 것이다. 이 사실은 환자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제도적인 역할이라는 것으로 여겨질 때 가장 중요하다.
질병과는 다른 선택지는 고립된 개인, 개별 범죄자나 부랑인에게만 열려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비행집단과 같은 사례와 같은 일탈 집단의 형성에도 관련할 것이다. 또는 마침내 그들은, 마치 이단적 종파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사회의 가치 체계라는 측면에서의 정당성을 요구하기를 포함하는 집단 형성에 관련할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자가 되는 것은 대개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종교적 독실함을 “좋은 것”으로 정의하여 범죄의 사례와 관련된 사회와의 갈등의 같은 체계가, 종교적인 사례와는 관련이 없을 수 있게끔 한다. 이러한 다양한 일탈적 양식의 발생과 중요성, 그리고 여기서는 다룰 수 없는 그들 서로 간의 관계에 관련하는 많은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가장 필수적인 지점은 질병이 그러한 선택지들 일군 중 하나의 양식이라는 것, 그리고 질병의 핵심적인 동기적 구성 요소들이 그것에 독특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일반적으로 중요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Ⅱ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주요 주제, 질병이 그저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이기도 하다는 측면의 주제로 옮겨갈 것이다. 사회적 역할의 필수적인 기준들은, 그 역할에서의 사람들에게 거는 적절하거나 적합한 행동에 대한 기대를 정의하는 사회적 규범들의 집합과의 연관에서, 의무적인 것에 대한 태도와 그가 상호 작용하는 타인에 대한 태도 모두와 관련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사회 안에서의 “환자 역할sick role”의 네 가지 주요 특징을 구별할 것이다.
첫 번째는 환자가, 그의 정상적인 사회적 의무에 대한 특정한 수행으로부터의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단순한 사례로 “조니는 열이 난다. 그는 오늘 학교에 가선 안 된다”를 들 수 있겠다. 이것이 적용되거나 적용되지 않는 때와 관련해서 이 결정과 면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정신의학자들은 정신질환의 “이차적 이득”에 대한 동기적 중요성에 충분히 익숙하여 의식적인 꾀병만이 아픈 것의 특권을 남용하는 유일한 문제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있다. 요컨대, 면제에 대한 환자의 요구는 반드시 사회적으로 정의되고 승인되어야 한다. “그저 일할 기분이 아닌” 모든 경우가 그러한 타당한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두 번째로, 매우 한정된 의미에서, 환자는 그의 상태에 대한 특정한 형태의 책임으로부터도 면제된다. 이것이 보통 ‘그는 건강하다’[그는 “조건” 속에 있다he is in a “condition”]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져야 하거나 그에게 행해지는 무언가를 받음으로써 “치료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그저 의지력만으로 “기운을 차릴 것”이라고, 그러므로 괜찮아지기로 결심할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기대될 수 없다. 그가 그러한 상태가 된 데 그의 책임, 사고나 감염에 부주의하게 노출됨에 의한 것과 같은 책임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럴 때에도 그에게는, 부수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나아지는 과정에 대한 책임이 없다.
하지만 의무나 특정 종류의 책임으로부터의 면제에는 대가가 따른다. 환자 역할의 세 번째 측면은 그것에 대한 정당화의 불완전한 측면이고, 그렇기에 온전한 정당화에 대한 권리의 결여이다. 아픈 것은 즉,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정의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고, 가능한 신속하게 쫓겨난다는 것이다. 아픈 것에 대한 특권을 필요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그가 “어찌할 수 없는 한”에서만 받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환자는 고립되고, 그의 일탈적인 양식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호소할 권리가 결여된다.
마지막으로 넷째, 아프다는 것은 또한, 가장 가벼운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도움이 필요한” 것으로 정의된다. 게다가 필요한 도움의 종류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 특히 자격이 주어진 사람들, 무엇보다도 의사가 내린— 추정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므로 아프지 않은 사람과 관련된 역할의 담당자로 정의되는 것으로부터, 아픈 사람은 환자의 추가적인 역할로 이행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모든 사회적 역할에서처럼 특정한 의무를 안는데, 그것은 특히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의 의사나 다른 치료사에 “협조하는” 의무이다. 이것은 분명히 아픈 것, 그리고 그러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한 승인의 긍정을 구성하고, 개인을 특정한 재통합적 영향에도 노출시킨다.
이러한 네 측면 모두에서, 정신병리학적 현상이 근대 정신병리학의 발전 이전에 이미 우리 사회에 분명히 성립된 역할 양식에 동화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이것은, 특히 아마도 환자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도움의 종류라는 점에서 보면 근대 서구 사회에 특유하다. 많은 사회에서 신비적인 조작이 치료에서 가장 지배적인 요소로 있어 왔다.
우리 사회에서, 심각도가 어느 정도이든 여러 사례에서, 정신적인 “사례”를 아픈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다소 다른 역할 정의, 즉 “미친insane” 것으로 정의하는 것과 경쟁했었다. 책임이라는 개념과, 그것의 적용 방식과 범위가 가장 주요한 차이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아마, 미친 사람은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 그의 상태에서 벗어날 책임을 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통상적인 관계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없는, 그러므로 그의 상태, 장애, 그리고 그에게 도움이 필요함을 인지할 책임이 없는 상태로 정의된다고 말할 것이다. 책임의 결여라는 이 개념은 강제 입원과 같은 정신이상자the insane에 대한 강압의 정당화로 이어진다. 두 역할 정의 사이의 관계는 여기서는 더 다룰 수 없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 교정정신의학학회 구성원들이 특히 관심을 가질 다른 복잡한 문제, 즉 환자가 어린이인 경우와 관련된 상황을 언급하면 좋을 것이다. 어린이의 역할 때문에, 여기서, 특히 어린이에게 부과될 수 있는 책임감의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성인 환자 역할의 몇몇 특징은 대체되어야 한다. 이는 정신적으로 아픈 어린이의 역할이, 특히 성인 신경증 환자의 역할보다는, 정신이상자의 것에 특정 측면에서 가깝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제삼자, 특히 부모가 그 상황에서 유달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소아과 의사들이 “내 환자”라고 말할 때, 종종 환아가 아닌 어머니를 의미하는 일이 흔하다. 정말 중요하게도, 소아 정신과 의사들이 그저 어린이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대해 적극적으로 처치해야 한다.
Ⅲ
우리는 이제 세 번째 주요 문제 영역, 치료자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그가 병원적 과정을 반전시키는 것과 관련된 동기적 과정과 맺는 관계에 대한 영역으로 넘어갈 것이다. 이 과정은, 널리 인식되기로, 어떤 의미에서는 발병과 관련된 과정을 모종의 복잡한 요인들을 적절히 고려해 준수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간략히 다뤄질 수 있는 성공적인 정신 치료의 네 주요 조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것은 정신의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지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에 의해 여기서 본질적으로, 사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우리가 위에서 논한 발병의 핵심적인 부분을 수행하는 것의 결여를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예에서 [형성되는 것은] 치료자와 그의 환자에 의해 형성되는, 치료자가 그의 환자를 “돕는다는” 온당한 범위 내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의무를 맡는 연대 집단이다. 의료 전문가의 “이데올로기” 안에 있는 치료자의 첫 의무로서의 “환자의 안녕”에 대한 강한 강조는 이 요소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전문가의 역할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당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 태도를 상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원은,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본질적으로, 넓은 허용치에서 환자가 하는 바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것이므로, 무조건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알 수 있다시피, 이것이 치료자가 “환자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도록” 의무를 진다는 의미로 무제한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 요소는 가족과 같은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표현인 소망과 환상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특별한 허용이다. 이 허용은 불허와 그와 같은 형식으로의 그러한 표현에 대한 정상적인 제재가 유예된다는 것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물론 그러한 “실연實演”에 명백한 제한이 있다. 일반적으로 그 허용은 구두와 몸짓의 층위에 한정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치료 과정의 필수적인 특성이다.
하지만, 허용에 대한 준수는 그것에 대한 치료자의 반응에의 아주 중요한 규제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치료자가 환자의 일탈적인 소망과 환상에서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표현된 기대에 화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정하듯이, 가장 근본적인 소망은 그 개인과 타인 사이의 호혜적 상호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소망을 표현하는 것은 사실 상호 보완적인 역할에서 교류하기 위해 타인을 초대하는 것이고, 만약 그것이 일탈적인 소망이라면 상대방을 상호 교류 안으로 “유혹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것은 긍정하는 태도만큼이나 부정하는 태도로 이루어진 사실이다. 전이에서 치료자에 대해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은 소망에 대한 부분적인 만족일 뿐이다. 온전한 만족은 치료자가 결과적으로 화나게 됨에 따른 응답을 요구할 것이다. 때로 “역전이”라고 불리는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치료자가 그의 역전이적 충동을 통제해야 한다고 기대되며 그러한 통제가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치료의 조건이라는 것은 꽤 분명하다. 환자에게 이러한 전이 반응에 대한 투사적 성격을 보임으로써, 상호 교류에 대한 거절은 환자에 의한 통찰의 달성을 가능하게 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을 수행한다.
마지막으로 넷째, 지원의 무조건적인 요소와 대조하여, 치료자에 의한 승인의 조건적 조작이 있다. 치료자가 허가를 주거나 주지 않는 것은 환자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판단의 유효성의 필수적인 조건인 것으로 보인다. 환자에 의한 판단의 수용은 이러한 행위에 승인을 보여준 치료자와 함께 성숙한 평면에서 문제에 대해 의논할 수 있는 환자의 능력을, 상대적으로 보여준다. 명시적인 거부는 치료에서 거의 드물게 사용되지만, 긍정적인 승인을 주지 않는 것은 확실히 매우 의미 있다는 것이 아마 중요할 것이다.
준수하는 것이 중요한, 성공적인 정신치료의 네 가지 조건들은 모두 어느 정도에서 우리 사회의 치료자가 전형적으로 상정하는 의사의 역할 “안에 들어 있고”, 모두 어느 정도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정신치료의 의식적이고 명시적인 이론이나 기술에 독립적인, 그 역할에서의 행동의 양상들이다.
환자의 안녕에 우선적으로 정향된 의사의 역할에 대한 정의와 지원의 관계는 이미 언급했다. 허용의 요소는 “허가”가 신체적 결함을 가진 환자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환자들에게까지 기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사회적 승인에 근간을 두고 있다. 환자를 치료한다는 그의 특별한 책임 덕에, 의사는 그러한 허가를 만들 특별한 의무가 있다. 하지만 세 번째 [조건에서 말한 것처럼], 의사는 그의 역할의 정의상 환자와의 특정 호혜 안에 들어가지 말 것을 분명히 명령받거나, 환자들이 그에게 가하는 압력에 대해 보호받는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관계에서 내밀한 정보를 주는 것은 상호적 친밀함의 상징이지만, 의사는 그의 사적인 일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 의사-환자 관계의 많은 특징들, 의사가 몸을 만지는 일과 같은 것은 성적인 반응을 일으킬지도 모르지만, 의사의 역할은 그러한 전개를, 비록 그것이 환자에게서 시작됐을지라도, 억제할 수 있도록 정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건강의 문제만을 고려하도록 특히 제한되어 있는 의사 역할의 정의와, 인간적인 감정에 연루되지 않는 “비인격적”, 사무적 태도를 지키라는 명령은 환자의 일탈적인 기대에 응답하는 것에 대한 그의 거부를 정당화하고 적법화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의사의 과학적 훈련에 대한 위신, 기술적 능숙함에 대한 그의 평판은 그의 승인에 권위를, 그의 판단에 대한 [환자의] 승인의 기초를 부여한다.
Ⅳ
의사 역할의 모든 근본적인 특징들은 정신치료의 기술적 작동에 독립적으로 주어진다. 게다가 그것은 프로이트의 시기 혹은 의료계의 중요한 분과로서의 정신의학의 시기 이전에 오랫동안 제도화되었다. 이 사실이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첫째, 이는 사실 신중하고 의식적인 정신치료가 그 과정의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 준다. 더욱이 의사 역할의 이러한 측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의료적 기술”이라고 오랫동안 불려 온 것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의사가 그것을 알든 혹은 바라든 간에, 의사로서 능숙하게 행동하는 데서 그가 실은 항상 환자에게 심리치료적 효과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그럴 듯하다. 더 나아가, “정신에 대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사례에도 이것이 중요하다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것은 우선 “정신적 요인”이 겉으로는 신체적인 사례의 상당히 큰 부분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병인론에서의 정신적 요인 외에도, 질병은 항상 어느 정도는 환자에게 압력이 주어지는 상황이며, 그러므로 압력에 대한 그의 반응을 다루는 기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압력이 정신병리적 결과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의료적 기술과 신중한 정신치료 사이의 필연적 연속성은 그러므로 의사의 기능의 본성에 일반적으로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근대적 정신치료는, 서구 사회의 사회 구조에 이미 정립된 것으로서의 의사의 역할 위에 세워져 왔다. 그것은 기존의 역할 양식을 이용하고, 그 특징들의 일부를 연장하고 개선했지만, 의사와 환자의 역할은 정신의학 이론의 적용으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두 번째의 주요한 함축은, 의사 역할과 질병의 이러한 특징들이 정신병리학 이론의 적용과는 독립적으로 사회 구조 안에 구축되었다면, 그것이 고립된 현상이며 이 하나의 맥락에서의 중요함에 국한되어 있음이 드러난다면 정말 이상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믿을 만한 이유가 주어졌듯이 질병이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사회 체계 안의 압력에 대한 동기적 반응이라는 공통 자본에 대한 여러 표현 양식의 묶음 중 하나라면, 이는 특히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에 대한 적절한 용인만 있다면 우리는 같은 이 특징들 중 몇몇이 사회 체계 안의 다른 역할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일 수 있다. 당신에게 특히 관심을 끌 만한 예시를 들자면, 정신치료적 과정과 아이들의 규범적 사회화의 과정은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차이점도 크다. 그것은 어느 정도, 아이에게는 부모 두 명이 필요한 듯하지만 신경증 환자는 한 명의 정신의학자와만 [그 과정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지도指導, 사회 안에서의 그리고 많은 타인들과의 갈등 해결이라는 제도 안에서 수많은 동일한 요인들이 작동한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정신치료의 실제 기술적 작업에서 가시적인 과정들은, 개인 안에서 그리고 개인에게 작동하는 힘의 전체적인 균형과의 관계에서, 수면 위에 돌출된 빙산의 일부와 닮아 있다. 그 표면 밑에 있는 것은 훨씬 크고, 어떤 관점에서는 아마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이는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그에 대한 대응이라는 현상들이, 그것이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사회 체계의 전반적인 평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인다. 이 일반화로부터 우리는 일반적인 추론이 아닌 어떤 것에 가까워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난 세대 정도에서 정신 질환이 상당히 증가했다고 여겨지는 듯하다. 통계가 분명히 부분적이며 진단과 치료의 유행하는 방식이 대단히 변해 왔기에 이를 증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실이라 치더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단순히 일반적으로 증가하는 사회적 분열에 대한 지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질병의 역할에는 어떤 긍정적인 기능들이 있다. 환자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그의 상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선언되고 그는 영향들을 재평형화하는 방식으로 위치 지어진다. 정신 질환의 증가가, 다른 표현 방법들에서 질병의 역할로 일탈하는 경향이 전환되는 것을 구성한다고 말하는 것도 전적으로 가능한데, 그 결과는 다른 어떤 것이 그러할 것보다 사회의 안정성에 덜 위험하다. 의사가 “문제적 사례들”로 이루어진 특별한 집단에 대한 돌봄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 한, 그는 그가 속한 사회에서 전반적인 힘의 균형 안의 전략적인 위치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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