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Valueable 500에 실린 「OPINION: DISABLED IS NOT A BAD WORD」를 번역한 것이다.
https://www.thevaluable500.com/spotlight/opinion-disabled-is-not-a-bad-word
나는 41세 장애Disabled 여성이다. 나는 장애를 대문자 D로 적는데 그것이 내가 지금 정체화하는 바이다. 나는 장애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정체화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1980년에 척추 갈림증을 가지고 태어났다. 나는 기기와 걷기 같은 모든 평범한 단계들을 또래들보다 아주 약간 늦게 달성했다. 그런데 당신은 내 등 아래의 커다란 혹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그 혹을 보고 “으, 그건 뭐야?”라고 크게 외치던 때에 나는 네 살이었다. 재밌는 것은, 나는 내가 어제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는 간신히 기억해 내지만, 누군가가 나의 일부를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던 기억은 항상 내게 박혀 있었다.
청소년기에 나는 척추 갈림증이 그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방식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척추 갈림증은 때때로 척추 신경이 꼬이게 했다.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라는 점에서 청소년기는 이 문제를 종종 악화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방광이 더 약해졌고, 낫지 않을 궤양들이 발에 무작위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많은 검사들 끝에 내 다리에 신경이 최소한으로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는 잦은 감염과 병원 생활 —목발, 휠체어는 물론이고 정형외과용 신발 신세로 이어졌다.
세상에, 난 그 신발이 싫었다. 14살이라면 잘 어울리고 멋있어 보이는 것을 원할 따름이겠다. 나는 잠깐 동안은 흔들어 봤지만 주기적[으로 신어야 했던] 거대한 신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스꽝스러웠다. 지금은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좋은 친구들이 없었던 청소년기의 나는 아무에게도 나를 웃음거리로 삼을 구실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학교를 떠나고, 본가에서 나가고, 더 자율적이게 되면서, 나는 종종 내가 건강상의 손상으로 인한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길 계속했다. 난 쉬고 싶지 않았었다. 병원에서 벗어나 곧바로 펍으로 가고 싶었다. 그리고 한 번은 친구에게 내가 춤 추러 나갈 수 있게 깁스 벗기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었다. 이런 위험한 짓을.
나는 장애가 이득이 된다고 주장했고, 장애인 주차 배지를 받았고, 보행보조기를 썼다가 안 썼다가 했지만 여전히 장애인이라고 정체화할 수는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장애를 불쌍한 것, 불편한 것, 웃음거리로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척추 갈림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보행보조기가 내 삶의 붙박이가 되기 전까지는 가능한 그 사실을 숨겼다. 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는 여전히 내게 장애인임은 ‘나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나는 스스로를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differently-abled’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돌아보면 구역질이 난다.
두 개의 큰 사건이 내 모든 것을 바꿨고, 그 둘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찬란한 선물처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첫번째는 인스타그램에서 장애인 공동체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그들 스스로를 장애인이라고 칭했고, 보행보조기 —알다시피, ’장애인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사진에서 숨기려고 노력했던 것들과 함께 움직였으며, 그것은 멋져 보였다.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공유했고, 접근불가성inaccessibility을 성토했고, 스스로를 옹호했고advocate,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을 옹호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창작했고, 서로를 지지하고 인정했다. 나는 내 공동체를 발견했고, 그럼으로써 나는 항상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나의 일부를 포용했다.
모든 것을 바꾼 두 번째 사건은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나의 내면화된 비장애중심주의를 걷어 낼 수 있게 했다. 이것은 마치 그것이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끔찍한 이별 뒤의 순간 같았다. 나는 항상 내가 가진 척추 갈림증이 ‘나쁘다’고 생각하곤 했다. 장애인임은 ‘나쁜’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장애인임은 나의 잘못이거나, 내가 민폐나 짐이라는 것이었다. 사회적 모델은 동의하지 않는다.
의료적 모델과는 달리 사회적 모델은, 내가 의료적 [관점에서 접근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나를 불능하게 하는disable 것은 세계라고 말한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아라. 척추 갈림증이 고통과 어려움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마주하는 사회적 어려움이 내 실제 장애보다 나를 종종 더 불능하게 한다.
내가 휠체어로 돌아다닐 수 있는 접근성 좋은 쇼핑 센터에 놓아 보자. 그리면 나는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경사로가 없거나 너무 가팔라서 오르내리는 데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느끼는 것처럼 불능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걸을 수 없지만, 휠체어가 그 문제를 해결한다. 불능하게 하는 것은 접근불가성이다. 접근불가성이 오직 휠체어 이용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단 몇 개의 예시만 들더라도, 장애인들은 적절한 의료 서비스에의 접근권의 결핍, 점자나 캡션1과 같은 의사소통을 위한 접근권의 결핍을 마주한다. 편안한 장소, 편안한 시간, 많은 분주한 공공장소에서의 적절한 앉을 장소가 부족하다. 우리들의 장애가 얼마나 다양한지 생각해 보자. 그럼에도 대부분의 장애인은 아마 모두 가장 좋게는 사람들의 기이해하는 —최악으로는 증오하는 태도를 마주쳐 왔다. 이런 것들이 걷지 못하는 것들보다 나를 더 아프게 하고, 불편하게 하고, 좌절하게 한다.
우리가 노동에, 교육에, 사회적 삶 등에 동일한 접근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비장애인만큼 보수를 받았다면, 결혼하는 데 불리하지 않았다면, 혐오 범죄의 대상이 아니었다면, TV와 미디어에서 공정하게 재현되었다면, 적절한 의료 서비스에의 접근권이 있었다면, 적절한 비용의 살기 좋은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접근권이 있었다면, 그러면 장애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장애를 부정할 때, ‘다른 능력을 가진’이나 '불리함이 있는handicapable’ 따위의 용어로 장애를 부드럽게 말하려 노력할 때, 장애인들이 마주하는 사회적 장벽에 대한 인지를 지운다. 그것은 정체성을 지우고, 다양하고 멋진 공동체를 지운다. 나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거니?”라는 낡고 피곤한 질문에 “내가 장애인임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대답했던, 좋은 뜻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기분 나쁜 “너는 확실히 장애인치고는 능력 있다”는 [질문자의] 말로 이어졌던 일을 기억한다. 내가 동네 상점의 절반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정말 틀렸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장애인’이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종종 비장애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장애’가 사람들을 모욕하기 위한 장애혐오적ableist 욕설의 주제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놀랍지 않다. 또한 장애가 주류에서 논의될 때를 생각해 보면, [그 때의 발언들은] 종종 장애인의 목소리가 아니다.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장애와 가까운 사람들 —의사나 돌봄 노동자 등이다. 예를 들어 ‘다른 능력을 가진’이나 ‘특수 요구’라는 말은 부모들이나 특수교사들 사이에서 아주 흔하게 쓰인다. 그러니 나는 많은 비장애인들이, 많은 장애인들이 장애인이라고 정체화한다는 것과 다양한 번성하고 있는 장애인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거나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다.
물론 장애인들이 단일한 것은 아니다. 내 장애인 친구 대다수가 정체성 우선 용어를 선호하는 것이다. 당신이 장애인임[장애인이 되는 것]이 ‘나쁜 일’이라고 말하는 내면화된 비장애중심주의를 걷어 내기 위해 수년을 고군분투했다면, 사람들이 그 점을 지우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모두가 이런 식으로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장애와 문화는 우리가 정체성 우선 용어를 선호할지 사람 우선 용어를 선호할지2에 대해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정체화하기 위해 [용어를] 고르는 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을 것이다.
사람 우선 용어를 사용하는 것의 배후에는 장애 뒤에 있는 사람을 혹은 장애 이전의 사람을 보자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장애와 함께인 채로도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내 장애는 나의 모든 것을, 내 삶의 모든 영역을, 긍정적이거나 더 많게는 어려움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관통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내 장애는 중립적인 것이기에 나는 나 스스로와 내 장애를 분리하고 싶지 않다. 한편 내가 속한 장애인 공동체는 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끝내주게 아름답다.
그래서, 당신이 사람 우선 용어와 정체성 우선 용어 중 어떤 것이 옳은지 확답을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에 대답은, 그것에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이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 공동체를 대신해서 ‘장애인임’이 나쁜 말이라고 결정해 버리는 경우는 예외이다. 난 이런 것을 종종 목격했다. 포괄적으로 말해서, ‘장애인임’이라는 용어는 역겹고 편협한 완곡어법으로 대체되고 이를 둘러싼 [문제를]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장애인은 전적으로 무시된다. 절대 그러지 말아라.
사업체, 기업, 조직에서 장애인을 어떻게 지칭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나는 그것이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단순하게 ‘장애인Disabled people’과 ‘장애를 가진 사람People with disabilities’ 둘을 함께 사용해라. 그리고 당신이 누군가를 ‘장애인’ 혹은 ‘장애를 가지고 있음’이라고 언급해야 할 때, 어떤 것을 사용할지 확신이 없다면 물어봐라. “당신은 장애인[이라고 불리기]를 선호하십니까 아니면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불리기]를 선호하십니까?”
내 친구들 사이에서 대다수의 장애인들은 장애인임이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표현을 피하거나 어떻게든 좋게 포장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 표현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리고 확실히 당신이 사실은 우리를 불편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가?
2022.04.06. 니나 테임(Disability Content Consul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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